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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군 다산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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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다산

마을소개

송곡1리

  • 작성 : 총무담당
  • 2010-02-03 15:59
  • 조회 1808

ㆍ마을역사 : 본래 성주군 벌지면의 지역으로서 씨실, 금곡, 송곡리라고 하였는데 고종(광무) 10년(1906년)에 고령군에 편입되고, 1914년의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하로동과 삼동을 병합하여 송곡동이라 해서 다산면에 편입되어 1988년 5월 1일에 동이 리로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 일반현황 - 씨실, 송곡, 금곡 : 이 마을은 깊은 골짜기 속에 산이 병풍처럼 둘러 싸여 가을에 단풍이 들면 비단같이 아름다운 골짜기라는 뜻에서 금곡(金谷)이라하고 산에는 소나무가 울창하여 또한 송곡(松谷)이라 하였다. - 삼동(三洞) : 송곡에서 서남쪽에 위치한 송곡2리 마을인데, 이 마을을 형성할 때 수성나씨(壽城羅氏), 함안조씨(咸安趙氏), 안동권씨(安東權氏)의 3성이 개척하였다 하여 삼동이라 하였다. 현재는 다산2일반산업단지 조성으로 주민이 타 지역으로 이전하였다. - 아래놉닥, 아래놉대기, 하노다(下老多), 하노동 : ① 삼동 동쪽의 낙동강가에 있는 마을인데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이 영조 임금 아들(사도세자)의 경종사호(景宗賜號) 문제로 장희빈에게 휘말리어 제주도로 귀양을 가면서 낙동강 수로를 이용하여 가는 도중이곳에서 잠깐 쉬어갈 때 노인들이 많은 것을 보고 노다(老多)라고 불렀다. 음이 변하여 놉대기라 하고 아래 노다를 아래 놉대기라 부른다. 놉대기에는 우암 송시열 선생을 모신 노강서원(老江書院)이 현재도 남아있다.



<송곡리 씨실마을 창녕조씨 집성촌>



조선 중종 때 담양전씨가 처음 마을을 개척하였고, 1728년(영조 4년) 경 창녕조씨 태복경공파 조성좌(曺聖佐)의 장자 조명상(曺明相)과 동생 조명협(曺明莢)이 경상남도 합천군 묘산면 도옥리에서 달성군 가창면 정대리를 거쳐 고령군 다산면 송곡리로 와서 정착하여 입향조(入鄕祖)가 되었다. 이후 후손들이 세거하면서 집성촌을 이루었다.



<창녕조씨(昌寧曺氏) 연원(淵源)>



조성좌(曺聖佐)는 대호부로 합천·고령 양 고을에 많은 토지를 갖고 있었으며 가신(家臣)이 800명이 넘었다 하며 식사 때마다 곡식 씻은 물이 몇 십리를 흘렀다고 합천 지방에서는 전해오고 있다. 혼탁한 정치를 바로잡고자 영조 4년(1728) 지방선비들이 거사를 일으킨 것이 무신사화다. 실패한 자손들은 멸문지화를 피하기 위해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 했다. 장자인 조명상(曺明相)과 아우 조명협(曺明莢)은 고향인 합천군 묘산면에서 심산유곡인 달성군 가창면 정대리에 잠시 은거하였다. 이후 무신난이 어느정도 평정되고 도촌(陶村) 조응인(曺應仁)의 막내 손자 조시민(曺時閔)이 합천에서 먼저 이거(移居)하여 칩거(蟄居) 중 이던 지금의 경상북도 고령군 다산면 송곡리에 함께 거주하게 되어 송곡 입향조(入鄕祖)가 되었다. 이때가 조선 영조4년 1728년 경이다.



<창녕조씨(昌寧曺氏) 관련 유적>



창녕조씨 태복경공파 송곡문중 후손들이 선조를 위한 추원보본(追遠報本)과 친목을 도모하는 종청(宗廳)으로 활용하기 위해 1916년에 창건한 경심재, 개항기 성리학자 봉강 조상(鳳岡 曺塽)을 기리기 위해 문하생들이 1938년에 건립한 후송재, 조상(曺塽)의 증조모이자 창녕조씨 문중의 효부 해주오씨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1930년에 세운 해주오씨 숭효각이 있다. 후송재 좌측에는 다산면 송곡리 집성촌의 입향조 형제의 아버지인 조성좌의 유허비인 창녕조공휘성좌유허비가 있고, 후송재 내부에는 2012년에 후학들이 봉강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봉강선생창녕조공송덕비가 있고, 후송재 우측에는 유학자였던 학산 조을환(學山 曺乙煥)을 기리기 위해 후학들이 세운 학산창녕조공추모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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